안녕, 친구!

이번 한 주는 어떻게 지냈어?

난 전시 준비로 조금 바빴어. 일주일 내내 크런치 모드로 지냈지. 😵

오늘 편지에는 두 번째 개인전을 앞둔 만큼, 재작년 퇴사 후 썼던 내가 생각하는 "아티스트"에 대한 글을 담아보았어.

편지 끝에는 전시회 초대도 덧붙일게. 그럼 재미있게 읽어주길!

<내가 부르는 나의 이름>

2021.11.30.

"I heard you are an artist.(네가 아티스트라고 들었어.)” Ian이 내게 말했다.

친구의 친구로 만난 우리는 여러 번 술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며 함께 놀았는데, 인제야 친구를 통해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들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나는 손사래를 치며 "Well, I don't think I’m an artist yet. Though I want to be. (글쎄, 난 아직 내가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렇게 되고 싶지만 말이야)”라고 답했다.

‘작가’ 혹은 ‘아티스트’라고 불리는 것은 내 오랜 꿈이자 목표였다. 그러나 '아티스트'만큼 애매모호한 직업이 또 있을까. 단순히 미술뿐 아니라 모든 예술 군에 속한 사람들을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분야가 무엇이 되었든 어떤 경지에 올라선 재능이나 숙련도를 가진 사람이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 특정 아티스트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 내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선뜻 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화가, 글을 쓰는 사람은 작가라고 배웠는데, 난 둘 다 하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늘 관심사도, 하고 싶은 일도 많던 나는 항상 남들 앞에서 자신을 한 마디로 딱 잘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을 보자기에 한데 넣어 예쁘게 매듭짓는 “아티스트(작가)”가 꿈이 되었다.

늘 꾸준히 쓰고 그렸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부르는 일은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내가 도달해야 하는 경지'라고 생각해서인지 그 이름 자체가 굉장히 높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론 반대로 너무 낮게 느껴지기도 했다. 종종 내가 인정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들을 예술이라고 만드는 사람들을 보며 나 자신을 그들과 동류로 분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 내 창작물 역시 하찮아 보일 수는 있으나, 요점은 내가 그만큼 “아티스트”라는 말을 무겁게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백수라면 직업란에 ‘아티스트’라고 적으라는 우스갯소리를 어디선가 들었다. 백수든 아티스트든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글과 그림으로 수익을 창출해야만 스스로 아티스트라고 칭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동안 온・오프라인의 크고 작은 기회들을 통해 내 작품을 판매해 본 적은 있었지만 아주 적은 금액이었고, 그 금액으로 내 작품의 가치가 결정된 듯하여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기회들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은 차차 나를 “윤나라 작가님”이라고 불러주기 시작했다. 항상 듣고 싶었던 호칭이었지만, 몇 년간은 들을 때마다 부끄럽고 얼떨떨했다. 그래서 Ian에게 답한 것처럼 손사래 치며 한사코 부정했다.

그러던 중 친구가 자기 친구가 쓴 책이라며 <백수도 성공은 하고 싶지>를 선물해줬다. 그중 다음 문장들이 와닿았다.

"이름은 중요하다. 남이 불러주지 않는다면 혹은 이미 붙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가 내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되고 싶은 대로 바람을 가득 담아서. 이름만 생겨도 슬픔은 한결 가신다. 부를 때마다 목적을 상기할 수도 있다."

"고심 끝에 내가 하는 일에 이름을 붙였다. '회사 밖 자립 실험 프로젝트', 부제는 '스스로 클라이언트와 제작자가 되어 홈메이드한 창작물로 먹고 살기'라고 정했다. 그게 뭐라고 형체 없던 일이 한결 번듯해졌다. 난 지금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고 클라이언트이자 제작자라고 생각하면 어깨가 펴졌다."

"이름은 자세를 만든다. 백수나 지망생이란 명칭이 달갑지 않았던 이유다. 백수는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이미지라면 지망생은 기약 없는 일에 물 떠다 놓고 기도하는 이미지였다. 나는 그보다 치열하고 바빴다. 정확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열심히 탐색하고 시도하고 실험했다. 지망생처럼 기약 없는 건 싫었다. 머지않은 미래엔 표류 생활이 깔끔히 종결되길 바랐다. 이름엔 바람도 실리는 거였다."

내가 불러주는 내 이름. 홀로 오롯이 서야 하는 내 어깨를 펴게 해주고, 소속이 없다는 슬픔을 가시게 해주며, 되고 싶은 바람이 가득 담긴 내 이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꽃>에서처럼 나는 비로소 내게 내 이름을 지어주었다. "철학과 문화예술경영을 전공한 아티스트. 매일 성장하는 삶이 목표인 경험 부자." 나와 닮은 새빨간 색을 입힌 명함도 만들어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자랑스레 건넸다. 그리곤 친구들과 앞으로 서로를 자신이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불러주기로 했다. 김한솔 작가님, 박정은 사장님 등등.

그리고 드디어 일을 그만두고 백수, 즉 진정한 의미의 아티스트가 되었을 때, 마치 하나의 문을 닫고 나오니 또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좋은 기회를 만났다. 평소 눈여겨 보고 있던 아트 옥션 플랫폼 <플리옥션Flea:Auction>의 제안을 받아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의 리오프닝 1주년을 맞이하여 열리는 아트 자선 전시에 내 작품을 두 점 출품하게 된 것이다. 아트 굿즈로서가 아닌, 작품을 작품으로서 판매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식적인 미술계 데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작품 아래 다음과 같은 소개글이 실렸다.

"윤나라 작가는 철학을 전공한 그래픽 아티스트입니다. 여성의 욕망과 고통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간결한 선과 구성, 강렬한 색상으로 풀어냅니다. 단순히 보기에 예쁜 그림이 아닌, 어떠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자 합니다. Nara Yoon is a graphic artist who studied philosophy. Through simple lines, composition, and vivid colors, she expresses the desires and pains of the women. Not only are beautiful, but her artworks also make the audience think.”

내가 부르는 나의 이름으로 다시 인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윤나라 작가입니다.

자, 글은 여기까지야. 어떻게 읽었어?

사실 나는 나를 포장하는 데 굉장히 능한 사람인데, 그래서 사람들에게 항상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비친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알지. 나만 아는 찌질함이 있다는걸. 그중 하나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찌질함이야. 너무 원하기 때문에 스스로 을이 되어 그 이름, 자리, 위치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계속 재보고 주눅 든달까. 그리고 이 글은 그걸 처음으로 가감 없이 드러낸 글이야. 이 글을 읽어주고 있는 친구에게도 그 솔직함이 가 닿았기를!

마지막으로, 전시 소식을 전해.

이번에 전시를 하는 곳은 카페 & 바로 운영되고 있는 을지로의 알렉스룸이라는 곳이야.

전시 기간 중 언제든 편하게 커피나 와인 한잔 하러 와.

하지만 내가 상주하지는 않기 때문에 혹시 내 얼굴을 보고 싶다면, 꼭 미리 연락해줘!

그럼 오늘도 읽어줘서 고마워.

안녕!

✦ 전시 제목 : VICIOUS

✦ 전시 기간 : 2023.02.06(월) - 19(일)

✦ 관람 시간 : 12:00 PM - 23:00 PM (Sun - 21:00)

✦ 전시 장소 : 알렉스룸 (서울 중구 을지로18길 8 2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