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아홉 번째 편지, 평범해 보이는 특권, 그리고 럭셔리 버스

안녕, 친구!

요즘 어찌 지내고 있어?

이곳 토론토는 요즘 날씨가 너무 좋은 데다가, 알록달록 색색깔의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어서 길을 나설 때마다 눈이 참 즐거워. 걸음걸음마다 꽃 사진을 찍느라 무척 바쁘지. 특히 라일락 향기가 길가마다 가득해서 연신 코를 킁킁대며 걷고 있어 😂

그리고 요즘엔 공원에서 혼밥/혼술/혼차 하는 취미가 생겼어. 아무리 생각이 많거나 피곤한 일이 있어도 초록 속에서 산책하는 사람들과 강아지들을 구경하며 맛있는 걸 먹고 있노라면 금방 다 괜찮아진다니까. 방금도 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뜨끈한 보리차를 텀블러에 담아 집 바로 앞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호록호록 마시며 멍을 때리다가 들어왔어.

사실 지금 일 관련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할 게 많은 상황이라 뉴스레터도 늦어졌는데, 무엇이든 결정되면 공유할게! 그래서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내가 전에 블로그에 게재했던 글을 한편 소개할까 해. 재미있게 읽어주길!

평범해 보이는 특권, 그리고 럭셔리 버스

2021.12.30.

약간은 늘어진 테이프 같지만, 또 그래서 여유 있고 경쾌한 '럭셔리 버스'라는 노래가 있다. 멜로디에 맞춰 약간의 율동을 추고 싶은 이 노래를 처음에는 아무 의식 없이 흥겹게 들었는데, 어느 날 문득 가사에 집중해보니, 그저 흥겹게만 흘려들을 노래가 아니었다. 가사 내용은 인도 여행을 간 화자가 럭셔리 버스를 예약했는데, 기대한 바와 달리 나타난 건 사람, 염소, 닭이 같이 타는 낡아 빠진 시골 버스. 황당하고 화가 났는데, 어떤 할머니는 돈이 없어 내리셔야 하는 걸 보면서 '아, 내가 탄 버스가 럭셔리 버스 맞았구나'하고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찌는 듯한 어느 여름 남인도에서

내가 애써 예약해놓은 멋진 럭셔리 버스

하지만 그곳에 갔을때 내가 만난 건

사람 염소 닭이 같이 타는 낡아 빠진 시골버스

나의 황당한 표정 화가 난 모습 뒤로

어느 인도할머니는 돈이 없어 내려야 했어

누군가에게 실망스런 일이

누군가에게 럭셔리함

그래 내가 탄 버스 럭셔리 버스 맞았어

럭셔리 버스 럭셔리 버스 부우웅

우리가 함께 타고 가는 멋진 순간들

럭셔리 버스 럭셔리 버스 부우웅

힘든 인생은 없어 럭셔리한 경험만 있을 뿐

우리는 기다리면 살지 멋진 순간들만

하지만 우릴 기다린건 황당한 순간들

하지만 먼훗날 뒤돌아 보면

모두 럭셔리한 무용담

걱정할 필요없어 모두 추억이 될테니

럭셔리 버스 럭셔리 버스 부우웅

우리가 함께 타고 가는 멋진 순간들

럭셔리 버스 럭셔리 버스 부우웅

재작년, 당시 사귀고 있던 미국인 남자친구를 공항버스 앞에서 배웅해준 뒤, 나도 그의 여행을 따라갈까 하며 고민하고 있었을 때, Rita가 이런 말을 해줬다. "동남아를 여행하면, 나라가 그동안 미국, 유럽을 여행하며 느꼈던 바와는 다른 것들을 느끼게 될 거야." 그 말을 듣고 결심한 뒤 3일 만에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옳았다.

우리가 캄보디아 시엠립의 한 호텔의 수영장에서 즐겁게 놀고 있을 때, 호텔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Can I ask you something?(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우리 예약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걱정했는데, 직원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쪽지를 꺼내더니 거기에 쓰여 있는 영어 단어들의 미세한 뉘앙스 차이에 관해 물었다. 열심히 일하면서 틈틈이 호텔 손님들을 통해 영어 공부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평생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과연 이 친구만큼 열심히 살고 있을까 회의감이 들고 부끄럽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 중 몇몇은 동남아 국가들을 "못 사는 나라"라고 부르며, 그 이유가 그곳 사람들의 천성 혹은 국민성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여행한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정말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내가 여행에 합류하기 전, 남자친구가 만난 베트남의 호텔 매니저가 10년간 일해서 받는 연봉과 자신이 별다른 경력 없이 쉽게 구한 영어 선생님이라는 직업의 연봉이 같았다고 했다. 우리가 비교적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물가가 싼 나라에 "럭셔리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리고 있는 "특권"이다.

노래 <럭셔리 버스>의 가사는 내가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느낀 점과 비슷하지만 달랐다. 혹자는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훨씬 저렴한 동남아에서 즐겁게 럭셔리 여행을 하고 오지만, 나는 한국에서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누리고 있는 그 "럭셔리"가 "럭셔리"로 느껴지지 않았다. 당혹스럽고, 불편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럭셔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치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음은 요즘 읽고 있는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발췌한 문장들이다.

평범해 보이는 특권

•특권을 일부 사람들만 향유하는 것은 아니다. 특권 privilege이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을 말한다.

• 일상적으로 누리는 이런 특권은 대개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라서 많은 경우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권은 말하자면 '가진 자의 여유'로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통수단 탑승을 특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외버스 좌석에 앉아서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의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누군가가 시외버스 탑승을 요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외버스에는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차표를 사도 버스를 탈 수가 없다. 타인은 갖지 못하고 나는 가진 어떤 것, 여기서는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특권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밴드 원 모어 찬스의 <럭셔리 버스>는 생각에 따라, 우리의 경험이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라, 럭셔리한 무용담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힘든 인생은 없어 럭셔리한 경험만 있을 뿐"이라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하지만 그 럭셔리한 일이 불평등한 구조에서 비롯된 거라면, 그것은 특권이고, 나는 아무리 그런 상태가 편하더라도 그저 편하게, 당연하게, 좋게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왜 나는 편하고 상대방은 그렇지 않은지, 혹은 왜 상대방은 편하고 나는 그렇지 않은지 그 원인을 파고들면서 굳이 불편하고 힘들게 살고 싶다. 편안한 상태에서 안주하는 태도가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는 게 아니라, 굳이 불편하고 힘들게 이런 시선들을 던지는 태도가 이 사회와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세상에서 럭셔리 버스를 타고 싶다.

우리가 다른 이에 비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충분히 감사하게 생각해야겠지만, 더불어 그것이 별다른 노력 없이 얻은 것이라면 이에 대해 한 번씩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해.

그럼 오늘 편지는 여기서 마무리할게.

남은 한 주도 행복하게 보내기를!

그럼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