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일곱 번째 편지, 정말 직업에는 귀천이 없을까?

안녕, 친구!

어떻게 지내고 있어?

난 저번 주 월요일에 처음으로 면접을 봤어! 쥬얼리 회사의 인하우스 그래픽 디자이너 포지션이었는데, 면접 분위기는 아주 좋았어. 무엇보다도 회사 임원분들께서 내 포트폴리오와 태도, 영어 실력 등을 극찬해주셔서 자신감이 뿜뿜했지.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내년 2월 말까지만 일할 수 있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라는 점이 그분들께는 큰 걸림돌이 되는 모양이야. 그래도 결과야 어떻게 되든 좋은 경험이었음은 분명해. 성공적인 첫 발걸음을 뗀 나 자신을 위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칠링이 잘 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사서 며칠 전부터 먹고 싶었던 짜파게티와 함께 마셨지. 긴장이 확 풀리면서 아주 꿀맛이더라.

그런 와중에 혹시 몰라서 바리스타로서도 카페 몇 군데에 지원해봤는데, 그중 한 곳에서 2시간 동안 트라이얼(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일종의 시험처럼 미리 일을 시켜보는 문화야)을 하기도 했어. 그런데 일을 해보니 여러 면에서 나와 잘 맞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날 바로 일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했지.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해보려는 마음가짐이었는데, 막상 와서는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며 뻗대느라 시간을 흘려보낸 것 같아. 그래서 이번 달 안에는 직종을 가리지 않고 어떤 일이든 해보려고 해. 그런데 이런 마음이 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건 솔직하게 말해서 내 나이와 경력을 생각하다 보니 생긴 어떤 오만함 때문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캐나다에 오기 직전 만났던 멋진 인연을 떠올리며 생각을 다시 다잡았어.

그 인연은 출국 바로 전날에 만났어. 짐을 옮기기 위해 용달차를 불렀는데, 기사님께서 오시기 전에 전화를 주셨고, 친절한 말투셔서 마음이 놓였지. 게다가 시간이 부족해서 아직 짐을 싸던 중인 나와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같이 일을 빨리 끝낼 수 있을지 스케줄을 조율하시는 부분에서 무척 센스가 좋은 분이라고 느꼈어. 그리곤 오셔서 짐을 옮기기 시작하셨는데,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무거운 짐을 번쩍번쩍 들고 옮기시는 거야. 적어도 60대로 보이셨는데 말이야. 내가 음료를 권해드렸는데도 일을 끝내고 드시겠다며 말없이 일하시는데 거의 두 사람 이상이 일하는 듯 속도가 정말 빨랐어. 그래도 거의 끝나갈 때쯤엔 내 많은 책을 보시곤 “문학소녀의 책장”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의 짐을 옮기다 보면 무슨 책을 읽나 보게 된다고 하시더라구. 아무래도 내 책의 대부분이 철학서였기 때문에 내게 혹시 철학을 공부했냐고 물어보셨고, 내가 그렇다고 답하면서 대화의 물꼬가 트이게 됐어. 기사님께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셨던 이야기, 시를 사랑하시고 종종 시 경연대회에도 참가하신다는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됐지. 나도 다음날 캐나다로 출국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어떤 계획을 가지고 떠나는지 말씀드렸어.

그렇게 한참을 재밌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출발하셨는데, 좀 이따가 벨이 울리길래 나가 보았더니, 기사님께서 너무 해맑은 얼굴로 공갈빵을 두 개 주시는 거야. 캐나다 가는 비행기 안에서 먹으라구. 😂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기사님의 그때 그 환한 미소가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웃음 짓게 되네.

사실 종종 모르는 어른이 말을 걸어오실 때면 딱 예의 없지 않을 만큼만 이야기를 들어드리면서 빠져나갈 구실을 찾는 나인데, 이 기사님과의 대화는 정말 즐거웠어. 그분의 긍정 에너지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지. 그리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떻게 할지 전략을 세우는 것과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컨디션을 지속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시며 노력하시는 점, 그리고 일 외적으로 취미 생활을 즐기시면서 자기 계발과 함께 삶의 균형을 챙기시는 모습에 정말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어. 게다가 내 짐을 아빠께서 받아주셨는데, 아빠와도 한참을 이야기하다 가셨다고 하더라구. 아빠께서도 너무 즐거운 만남이었다며 동갑 친구를 만나게 되어서 반가웠다고 하셨지. 나도 친화력이라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편인데, 기사님은 정말 어나더레벨이신 것 같아 😆 그리고 그 날 저녁 기사님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았어.

너무 감동이지 않니?(나도 기사님께 맞추어 약간 올드스쿨 느낌으로 답장을 보내봤어 🤣)

기사님께서는 한 이대 조형예술대학 학생과의 인연을 계기로, 그곳의 학생들과 교수님들의 전시를 위한 작품 운송도 도맡아 하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나도 앞으로 한국에서 다시 전시를 하게 된다면 이 기사님께 연락을 드릴 것 같아. “유쾌한 운송 기사님”이라고 번호를 저장해두었어. 어떤 사람들은 이분이 하시는 일을 하찮게 볼지도 몰라. 하지만 이렇게 유쾌한 태도로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고, 또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해피 바이러스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

이 분과의 만남을 다시 떠올리다 보니, 내가 여기에 온 이유 중의 하나는 사회적 압박과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는데, 그 시선이 사실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내재해 있다는 걸 깨달았어. 그리고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귀천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내 마음이 얼마나 천했는지도 알게 되었지. 이제 내 안의 이 못생긴 마음을 지워버리고, 무슨 일을 하든 기사님처럼 유쾌한 태도로 임해보려고 해!

약 한 달 전 뒷마당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발목을 살짝 삐었어. 그래서 그다음 날 집 근처에 있는 한의원에 다녀왔지. 들어서니 친근한 인상의 여성 한의원 선생님께서 맞이해주셨는데, 치료받으면서 선생님의 이민 스토리와 가족 이야기, 그리고 고민 등을 냅다 듣게 됐어. 선생님께서는 30살에 이민해 오셔서 여기에 사신 지 40년이 되셨다고 해. 당시 한국은 여성이 일하기에 쉽지 않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꼭 한의사로서 일하고 싶으셨던 선생님께서는 그런 사회적 제약이 없는 이곳 캐나다에 오게 되셨대. 여기서는 직업의 귀천 없이 모두가 자신이 일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옷차림 등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한국과 달리, 작업복을 입고 손톱 밑에 먼지가 끼어 있더라도 그런 것들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점이 좋다고 하시더라구.

스무살에 처음으로 직접 일을 해서 돈을 벌어봤던 게 생각나. 노동을 통해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내면서 자기 인생을 책임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제로 경험하니, 부모님을 포함해 모든 노동자들을 존경하게 됐지. 이처럼 모든 노동은 고귀하니, 중요한 건 그 안에서 귀천을 가려내는 게 아니라, 그 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라고 생각해. 나도 앞으로 이곳에서 그런 가치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할게!

오늘 편지도 읽어줘서 고마워.

그럼 남은 한 주도 행복하게 보내기를 바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