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두 번째 편지, 외계인과의 동거

안녕, 친구!

혹시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본 적 있어?

첫 번째 편지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청년마을>을 통해 거제, 공주, 강릉, 아산에서 한달살이를 해봤어. 그중 1인실을 제공받았던 공주를 제외하고 나머지 도시에서는 모두 룸메이트가 있었는데, 나는 외동딸인데다가 기숙사나 친구들과 살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낯선 곳에서 살아본다는 것과 더불어 낯선 이와 함께 산다는 것 역시 특별한 경험이었지.

그리고 지금 이곳 토론토에서는 3층짜리 하우스에서 3명의 하우스메이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어. 집주인 조지(George) 할아버지는 미국인, 사회복지사 마이카(Meike)는 독일인, 촬영감독인 굴밋(Gurmeet)은 말레이시아인이야. 한국인인 나까지 총 4개국이 모여 있지. 이렇듯 내가 지금까지 느낀 이 도시의 제일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다양성”이야. 지금까지 많은 나라의 도시들을 여행해봤지만, 그중 여기가 가장 다문화적인 것 같아. 그리고 그동안 여행하면서 인종차별과 캣콜링을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었는데, 여기서는 다행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어. 워낙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외지인으로 보이지 않아.

이제 하우스메이트들과도 서로 많이 익숙해졌어. 조지 할아버지는 내가 이사온 첫날에 코로나에 걸리셔서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데다가, 마주치게 되더라도 별다른 반응이 없으시길래 ‘내가 별로 탐탁치 않으신가’ 하고 걱정했는데, 그 다음주에 나를 보고 활짝 웃으시면서 “나라야, 나 이제 코로나로부터 완전히 회복된 것 같아. 그래서 앞으로 너와 대화할 수 있어!”라고 하시는 걸 보고, ‘순전히 코로나때문에 거리를 두셨던 거였구나’ 하고 안도했지. 게다가 한국 컵라면을 사서 드셔 보시거나,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고 오셔서 내게 자랑하신다니까. 너무 귀여우시지 않니? 할아버지께서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징집을 피해 캐나다에 오게 됐다고 하셨어. 그 뒤로 여기서 쭉 사셨으니, 이제는 미국보다 캐나다에서 산 세월이 더 길게 되신 셈이지.

마이카는 나보다 8살이 많은데, 나처럼 워킹 홀리데이로 캐나다에 오게 되어 여기서 쭉 살고 있는 중이야.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유를 물었더니, 독일보다 여기에서 오히려 더 소속감을 느낀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정을 붙이고 살아갈 곳'이라는 의미의 "고향"을 찾는 중인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서의 내 미래를 그려보게 되기도 했어. 그리고 아무래도 그동안 가장 많이 친해진 사람은 나랑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굴밋. 처음에는 좀처럼 얼굴 보기도 힘들고, 얘기 나눌 기회가 없어서 궁금했었는데, 어느날 저녁 그와 첫 대화를 나누게 된 뒤로, 저번 편지에도 썼던 것처럼 같이 드라마도 보고, ‘성 패트릭의 날’ 퍼레이드도 보러가고, 부대찌개도 먹고, 장을 보기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 호주에 이어 캐나다에 공부하러 오게 된 그는 이곳에서의 커리어 기회가 좋기 때문에 앞으로도 쭉 살 생각이라고 하더라구. 이렇게 우리 넷은 국적도 다르고, 캐나다에 오게 된 이유도 저마다 다르지만, 한 집에 사는 식구가 되어 서로를 존중하며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어.

캐나다에 오기 전, 가장 큰 걱정 두 가지는 1) 새로운 나라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와 2) 다른 사람들과 한 집에서 잘 살 수 있을까? 였어.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사실 쉽지만은 일이지. 가족과 사는 것도 종종 힘들 때가 있으니까 말이야.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른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 타인과 함께 산다는 건 외계인과의 동거와 진배없다고 생각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외계인 같은 존재인 거야. 모든 건 상대적이게 마련이니까. 꼭 한 집에 사는 것뿐 아니라, 한 나라에 사는 것도 마찬가지지. 그래서 다양성을 포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어떤 한 집단만을 기준으로 삼고 정상이라고 규제한다면, 나머지는 아주 손쉽게 비정상이 되어 차별받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이곳에서 느끼고 있는 “다문화”와 한국에서의 “다문화”는 아주 다른 것 같아. 다음은 내게 많은 깨달음을 준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의 한 부분이야.

“마치 한국사회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모든 사람이 다양한 문화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문화적 소수자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의 차이란 주류 집단인 '한국인'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다르다는 것으로서, 사실상 '정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는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라는 흔한 구호도, 여기서 '다름'이 주류 집단의 기준에서 '일탈'된 무언가를 지칭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틀림'을 전제하는 형용모순이 된다.”

캐나다인과 캐나다인이 아닌 사람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캐나다처럼, 한국이 언젠가는 한국인과 한국인이 아닌 사람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진정한 다문화 사회가 될 수 있을까? 굳이 국적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차이를, 무늬만이 아니라, 있는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나라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 누구도 배제되거나 차별당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말이야. 그래서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외계인처럼 느끼지 않는 사회가 될 수 있기를.

이번 편지는 좀 많이 늦었지? 기다렸다면 정말 미안해.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니 걱정은 말고! 단지 글이 잘 써지지 않았어 😅

앞으로는 늦지 않고 제때 보낼 수 있도록 할게.

미안한 마음에 내 방 창문에서 방금 찍은, 토론토의 파란 하늘 사진도 덧붙여.

항상 읽어줘서 정말 정말 고맙고, 남은 한 주도 행복하게 보내기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