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 냥 빚을 갚는 말, 천 냥 빚을 지는 말

안녕, 친구!

난 지금 캐나다 토론토야! 한국과는 14시간 시차가 있어서 지금 시간은 일요일 아침 10시. 나보다 14시간을 앞서 사는 너의 하루도 궁금하다. 어떻게 지내고 있어?

아무래도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에서 살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오늘은 편지가 좀 늦었어. 미안해.

토론토에는 이곳 시간으로 22일 수요일 저녁 6시에 도착했는데, 공항을 나서자마자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맞닥뜨려야 했어. 매우 캐나다스러운 환영이었지. 다행히도 내 캐네디언 친구인 줄리아가 공항에서 나를 픽업해줘서 무사히 임시 숙소인 호스텔에 잘 도착할 수 있었어. 줄리아가 아니었다면 그 험한 날씨에 커다란 수트케이스 2개와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어떻게 올 수 있었을지 상상도 안 가. 공항에서 차를 타고 시내로 오면서 줄리아는 캐나다 사람들의 특성에 관해 얘기해주었는데, 길에서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다고 하더라고. 줄리아는 나와는 반대로 한국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했었는데,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한국인들은 ‘뭘 쳐다봐?’ 하는 얼굴이어서 당황했다고 했어. 서울과 토론토는 면적도 엇비슷하고 대도시인 건 똑같은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나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 차이는 ‘마음의 여유’에서 오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내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내 그림으로 된 명함과 스티커를 항상 들고 다니면서 나눠 주는데, 이번에 전시회를 하면서 다 사용해서 더 주문했어. 출국 전까지 배송받을 만한 여유 시간이 없어서 직접 픽업하러 다녀왔는데, 인쇄 업체 사무실에 도착해서 직원분께 “안녕하세요, 윤나라 이름으로 된 스티커를 찾으러 왔는데요.”라고 말하자마자 정말 말 그대로 썩은 표정을 대면해야 했어. 그런 이름으로 된 건 없다고 제대로 찾아온 거 맞냐길래 나는 내가 잘못 찾아왔나 당황해서 죄송하다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가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지. 그런데 거기가 맞다며 “명함만들기 윤나라”라고 말하면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다시 들어가 그렇게 말했는데, “그렇게 말했어야지.”하면서 면박을 주는 거야. 내가 무례하게 말했으면 모르겠는데, 전혀 아니었거든. 별것도 아닌 말 한마디로 사람 기분을 이렇게나 나쁘게 만들 수 있나, 나도 되갚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이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얼마나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저럴까.”하고 그 사람을 가엽게 여기기로 했어. 그리고 나는 마음의 여유가 있으니까 이런 무례하고 기분 나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 보기로 했지. 아마 그 사람은 그런 태도로 이미 자기가 자기 살을 깎아 먹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지고 있을 테지.

하지만 반대되는 상황도 있었어. 내가 개인전을 했던 을지로의 카페 겸 와인바 알렉스룸은 2주에 한 번씩 신진작가들의 새로운 전시가 열리는 곳인데, 그곳에서 전시하면서 2주간 거의 매일 출근 도장을 찍다 보니, 매일 보게 되는 알바생 친구에게 이름을 물어봤어. 끝나는 날에는 그동안 내 손님들을 잘 챙겨줘서 고맙다며 작은 선물도 했지. 그랬더니 그 친구가 여태까지 전시를 한 작가 중에서 자기 이름을 물어봐 주고, 불러주고, 챙겨준 사람은 처음이었다며 고맙다고 와인 한 병을 선물로 줬어. 특히 우리 엄마께서 오셨을 때 좋아하셨던 와인을 기억해서 챙겨준 거였지. 내가 한 건 정말 별거 아닌 말 한마디였는데, 한 사람에게 이렇게나 마음의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도 함께 감동받았어.

모든 한국인이 마음의 여유가 없다거나, 모든 캐나다인이 마음의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그런 경향성이 있다면, 어디에서 오는 건지 알고 싶고, 나도 이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늘 간직하고 싶어. 한국에 있을 때면 나도 종종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잃게 되기도 하는 것 같거든. 그래서 이곳에서 지내면서 캐나다 사람들의 마음의 여유는 어디에서 오는 건지 한번 탐구해볼 생각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내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영향에 대해 기억하며,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누군가를 해치거나 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보려고.

아무튼 나는 지금까지 이곳의 주민등록번호 같은 SIN 넘버도 만들고, 은행 계좌도 개설하고, 도서관 카드를 등록하고, 집도 두 군데 보고 왔어. 오늘은 줄리아랑 점심을 먹고 집 두 군데를 더 볼 예정이야. 나와 잘 맞는 좋은 집을 찾을 수 있게 기도해줘!

그럼 다음 주에 다시 편지할게!

안녕!